성함조차 제대로 듣질 못했다
"물어보시지도 않았잖아요"
소피가 그 점을 지적했다 "제가 여쭤 봤던들 대답이나 해주셨겠습니까?"
"뭐든 말씀드리지 않았을까요? 그녀도 지지않고 말했다 "하지만 절대 진실을 말씀하시진 않았겠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밤은 진실 게임을 하는 밤이 아니니까요"
"제가 좋아할 만한 밤이로군요" 콜린이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어디 갈데 없냐?"
베네딕트가 물었다 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야 뭐 어머님께선 내가 무도회장에 있어 주길 바라시긴 하겠지만 꼭 거기 붙어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내가 그런 법을 만들지"
베네딕트가 내쏘았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잘 가라" 베네딕트가 말했다
나 혼자 몇 년은 굶은 늑대들과 싸우러..........." "늑대요?" 소피가 물었다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혼긱 찬 젊은 레이디들 말입니다"
콜린이 설명했다 "한 때의 굶주린 늑대들이지요
다들 아, 물론 지금 여기 계신 분은 열외로 하고 말입니다"
소피는 자신이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혼기가 찬 젊은 레이디'가 아니란 점을 지적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결론내렸다
"우리 어머님은 말입니다.........." 콜린이 입을 열었다 베네딕트가 신음했다
"어쨌거나, 우리 어머님은 말입니다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둘째 형님을 빨리 결혼시키는 것을
인생 최대의 과업으로 삼고 계시거든요"
콜린은 잠시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아 아마 저를 결혼시켜 버리는 게 더 큰 과업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널 집 밖으로 쫒아내실 수만 있다면 뭔 짓인들 못하시겠냐"베네딕트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소피도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저보다는 형님이 더 연세가 많으니까"
콜린이 말을 이었다 "저보다는 형님을 먼저 교수대로ㅡ 아차차,아니지,결혼식장으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지금 하는 말에 요점이 있는 게냐?" 베네딕트가 으르렁댔다
"아아니, 전혀"
콜린이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차피 나야 그런 놈인걸"
베네딕트는 소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말만큼은 진실이군요" "어쨌거나"
콜린은 소피에게 팔을 화려하게 휘저어 보이며 말했다
"레이디께선 오랫동안 마음 고생을 해오신 저희 불쌍한 어머님을 가엾게 여기사
사랑하는 형님을 결혼식장까지 몰아넣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아직 청혼도 하시지 않은걸요"
소피도 같이 장단을 맞춰 주며 농담에 끼여들었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저딴 헛소리를 하는거지?"
베네딕트가 투덜댔다 "저 말이에요?"소피가 물었다
"아니, 저 녀석 말입니다" "한 방울도 안 마셨지롱"
콜린이 장난스레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제부터라도 가서
퍼마시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오늘밤을 안 미치고 버티려면 그 방법밖엔
없을 것 같다" "가서 술이라도 퍼마셔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준다면"
베네딕트가 말했다 "내가 오늘밤을 무사히 넘기기도 훨씬 편할 것 같구나"
콜린은 씩 웃은 뒤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해보이곤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형젝ㄴ에 우애가 깊으신 걸 보니 기분이 좋군요"
소피가 중얼거렸다 동생이 들어간 문을 잡아죽일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베네딕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피를 바라보았다
"그걸 우애라고 부르십니까?" 소피는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악의를 가지고
서로를 헐뜯기만 하는 로자먼드와 포시를 떠올렸다
"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분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실 거란 게
눈에 훤히 보이니까요, 동생분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고요"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군요"
베네딕트도 '생각해 보니 당신 말이 맞았어, 난 그런 놈이었어' 란 투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는 씩 미소를 띠었다
"그걸 인정하는 게 좀 괴롭긴 하지만요"
그는 벽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다
"자, 말씀해 보시지요" 그가 말했다
"형제나 자매가 있으십니까?" 소피는 잠시 그 질문을 곱씹어 본 뒤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그의 눈썹 하나가 호기심을 가득 담고 거만한 곡선을 그렸다
그는 살짝 옆으로 고개를 젖힌 뒤 말했다
"그 질문에 답ㅎ시는 데 왜 그렇게 뜸을 들여야 했는지 못내 궁금하시군요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소피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눈에 떠올라 있을 것이 분명한
고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가족이 있었으면 조헸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평생 그것보다 더 원한 것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란 사람은 단 둘이 있을 때조차
한 번도 그녀를 딸로 인정해 주지 않아고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아라민타는 그녀를 역병 취급했고 로자먼드나 포시 역시 그녀를 자매ㅗ 여겨 준 적이 없었다
포시야 가끔 친구가 되어 주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소피에게 드레스를
수선해 달라 머리를 올려달라 신발을 반짝반짝 닦아 달라 주문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포시는 언니나 어머니처럼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부탁을 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차피 소피에게 싫다고 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전 외동딸입니다" 소피가 마침내 말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그 대답밖에 안 하시려나 보군요"
베네딕트가 웅얼거렸다 "네 그 대답밖에 하지 않으렵니다"
그녀가 동의했다 "좋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른하고 남성적인 느낌의 미소였다
그렇다면 제가 여쭤 봐도 괜찮은 질문은 어떤 겁니까?"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녹색이란 것 정도는 말씀드려도
될 것 같지만 그 외에 제 정체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하겠어요"
"왜 그리도 비밀이 많은 겁니까?" "그 질문에 대답해 드리면"
소피는 신비한 낯선 여인의 역할에 충실하게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겠지요 안 그래요?"
그는 앞으로 살짝 몸을 숙였다
"비밀이야 언제든 새로운 걸 만드실 수 있지 않을까요?"
소피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뜨거워졌다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충분히 귀담아 들었기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몹시 흥분되는 눈빛이긴 하지만 그녀는 사실 자신이 연기하는 여자와는 달리
그리 대담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 밤 전부 정도면 충분히 비밀이 되고도 남지요"
"그럼 제게 질문을 하세요" 그가 말했다 "제겐 비밀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도? 정말? 누구에게든 비밀 하나쯤은 있는 법 아니에요?"
"저는 예외인가 봅니다 제 인생이란 것은 정말이지 아무런 가망도 없을 만큼 따분하니까요"
"그 말은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진담입니다"
그가 어깻짓을 하며 말했다
"전 순진한 처녀는 고사하고 유부녀도 유혹해 본 적이 없답니다 도박 빚도 없고,
저희 부모님도 서로에게만 충실하셨던 분들이신지라"
그 말인즉슨 당신은 사생아가 아니란 뜻이로군요 그 말에 왠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물론, 그가 적자인 것이 문제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그녀가 서출이란 것을 그가 알게 되면 절대 그녀를 원하지ㅡ 적어도 번듯한 방법으로는 ㅡ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제겐 질문조차 하시지 않는군요" 그가 그녀의 주의를 상기시켰다
소피는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설마 그가 진담을 한 것일 줄이야 "조......좋습니다"
방심하던 터에 허를 찔러서인지 소피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귀하께서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요?"
그가 씩 웃었다 "그런 쓸데없는 걸 물어서 질문을 낭비하시렵니까?
"한 가지밖에 묻지 못하는 거였나요? "아니 그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신답니까?
저한테는 질문 하나 못하게 하셨으면서" 베네딕트가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대답은 파란색입니다"
"왜지요?" "왜냐고요?" 그가 되풀이했다
"네 왜요? 바다 때문인가요? 아니면 하늘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냥 파란색이 좋기
때문인가요?" 베네딕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기묘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ㅡ 왜 파란색을 제일 좋아하냐고? 왜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여인은 그 대답을 더욱 깊이 파고들며 이유를 묻는 것일까
"그림을 그리시나요?"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궁금해서 여쭤 본 것뿐입니다"
"그러는 레이디께서는 왜 초록색을 제일 좋아하시는지?"
그녀는 처억에 잠긴 듯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풀밭 때문인 것 같아요 나뭇잎 때문에 그런 것도 조금은 있지만, 역시 풀밭이에요
여름에 맨발로 풀밭 위를 달릴 때의 느낌 정원사가 낫으로
플을 고르게 베고 난 뒤의 냄새"
"아니 풀밭의 느낌과 냄새가 그 색을 좋아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그렇게 따지면 아무 상관도 없지요 혹은 그게 전부일 수도 있고요 전 말이지요
한 때 시골에 살았었는데........."
소피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거기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정도쯤은 알려진다 한들 큰일이 날 성싶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더 행복하셨었나요?"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뭔가 깨달음을 얻고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마 레이디 휘슬다운은 베네딕트와 피상적인 얘기 외에는 나눠 본 적이 없나 보다
그와 잠실도 얘기를 나눠 보았다면 베네딕트가 런던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남자란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 말이다
그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자 소피는 그가 자신의 영혼까지 꿰뚫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공운을 산책하시는 걸 좋아하시겠군요" 그가 말했다
"네" 소피는 거짓말을 했다 언제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갈 시간이나 있었던가
아라민타는 다른 하인에게 주는 하루 휴가조차 소피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꼭 함께 산책을 해야겠군요" 베네딕트가 말했다
소피는 대답을 회피하려고 아까 질문을 물고 늘어졌다
"왜 파란색을 제일 좋아하는지 여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히고 "당신이 내 질문을 회피했다는 것을 나는 알아'
란 인상을 소피에게 주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군말 없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도 레이디처럼 뭔가가 떠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요
오브리 홀에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ㅡ저는 켄트에 있는 시골집에서 자랐지요
하지만 그곳 물 색깔은 파랗ㄷ기보다는 잿빛에 가까웠지요"
"그렇다면 하늘이 떠올라서인가 봅니다" 소피가 말했다
"하늘이라고 해도 영국의 하늘이야 파랗다기보다는 잿빛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베네딕트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그래서 파란 하늘과 햇빛을 더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영국이 아니지요"
소피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한 번은 이탈리아에 간 적이 있습니다" 베네딕트가 말했다
"그곳은 항상 햇빛으로 가득하더군요" "천국 같았겠네요"
"저도 그럴 줄 알았지요" 그가 말했다
"그런데 오히려 비가 그리워지더라고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거의 반평생 창 밖을 내다보며
내리는 비에 투덜거렸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걸요"
"그래도 없어지면 허전할 거라니까요"
소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 인생에서 없어지면 허전해질게 뭐 있을까?
아라민타가 보고 싶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로자먼드가 없어도 별로 허전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 포시는 보고 싶어질지도 모르지
아침에 그녀의 다락방 창문으로 환하게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반드시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녀가 선대 백작의 사생아였음을 알면서도 하인들이 자신들끼리 웃고 떠들 때
그녀를 끼워 주곤 하던 것도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게 될 일은 없다 아니 그리워하게 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으니까 오늘밤이 끝나면ㅡ 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마법 같은 밤이 끝나면ㅡ모든 것은 예전과 똑같아질 것이다
그녀가 좀더 강하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예전에 펜우드 저택을 떠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아라민타의 집에서 사는 게 즐겁진 않지만, 그렇다고 귻을 떠난다 해도 인생이 확 핀다거나 하지는 않을 게 뻔하거늘
가정교사 일자리도 나쁘진 않다 그 일을 제대로 해낼 만큼 교육은 충분히 받았다
하지만 추천장 없이 사람을 고용해 주는 곳은 흔치 않고 아라민타가 추천장을
써줄 리도 만무하다 "아주 조용하시군요"
베네딕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잠시 생각을 했답니다" "무슨?"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면 무엇을 그리워하게 될 것인지, 무엇은 그립지 않을 것인지
하는 것을요" 그가 강렬한 시선으로 그녈ㄹ 바라보았다
"인생에 뭔가 커다란 변화가 왔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서글픔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니오" 그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나직해졌다
"인생이 바뀌길 바라나요?" "네"
그녀는 저도 몰래 한숨을 쉬었다
"네 물론이에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께로 가져가 양쪽에 번갈아 키스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그가 절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이면 난 사라질 거예요"
베네딕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키스를 스치듯 했다
"그렇다면 이 하룻밤에 우리의 인생을 담아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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