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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

신사와 유리구두 (6회)

"여기 가면이 있어요" 기븐스 부인이 경쾌학 말했다 머리 뒤에서 묶는 반가면이라 저녁 내내 한 손으로 치켜들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 필요한 건 구두 밖에 없네요" 소피는 아쉬운 표정으로 구석에 놓여 있는 초라하지만 신고 일하기에는 편한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

았다 불행히도 이렇게 호사스런 옷에 어울릴 만한 구두는 없어요"아까 소피의 입술에 붉은 연지를 칠해 주었던 하녀가 새하얀 구두 한

켤레를 들어 보였다 "로자먼드 아가씨 옷장에서 가져왔어요" 소피는 오른발을 구두에 넣어 보고는 금세 뺐다 "너무

 

커요" 그녀가 기븐스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 신으면 걸을 수도 없을 거예요" 기븐스 부인이 하녀를 바라보았

다 "포시 아가씨 옷장에서 한 켤레 가져와 봐" "포시 발은 로자먼드보다 더 커요" 소피가 말했다 "내가 제일 잘 알죠

 

매일같이 포시 신발을 닦는데" 기븐스 부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별 수 없네요 아라민타 마님의 컬렉션을 뒤

지는 수밖에" 소피는 몸서리를 쳤다 아라민타의 신발을 신고 어딘가로 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하지

 

만 아라민타의 신발이 싫으면 맨발로 가는 수밖에 없다 화려한 런던의 가장 무도회에서 맨발을 허용해 줄 성 싶지는

않았다 잠시 뒤 하녀가 새하얀 새틴에 은실로 수를 놓고 아름다운 인조 다이아몬드 장미꽃 장식이 달린 신발을 들고 돌아왔다.

소피는 아라민타의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불안했지만 어쨌건 한 발을 넣어 보았다 딱 맞았다 " 딱 어울리

 

네요" 하녀 중 하나가 은실로 놓인 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 이 드레스를 위해 만들어진 신발 같네" "지금 신발이

나 감상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기븐스 부인이 갑자기 말했다 "자 이제 제 말 명심하세요 마부ㅏ 백작부인과 아가씨

 

 

들을 무도회에 태워다 주고 돌아와 아가씨를 브리저튼 저택까지 태워다 줄 거예요 하지만 마님이 떠나고 싶으실 땐

언제든 떠날 수 있제 마차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니까 아가씨는 자정이 되기 전에 올아오셔야 해요 그 이상은

 

1분도 지체하시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소피는 고개를 끄더이고 벽에 붙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

 

은 시각이었다 그 말은 곧 무도회를 두 시간도 넘게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고마워요" 그녀가 속삭였다 "아아 너무

 

나도 고마워요" 기븐스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꼬리를 찍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아가씨 그거면 우린 만족해요"

 

소피는 다시 한번 시계를 바라보았다 두 시간 이 두 시간을 가지고 평생을 가야 하는 것이다

(2)

브리저튼 가는 정말이지 독특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설마 런던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들이 모두 판박이처럼 똑같이

 

생겼다거나 그들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앤소니, 베네딕트, 콜린, 다프네, 엘로이즈, 프란체스카, 그레고리, 히아신

 

스)로 지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믿는다 선대 자작과(여전히 팔팔하신) 자작 미망인에게 아이가 하나

 

 

더 있었더라면 아홉 번째 아이에겐 도대체 무슨 이름을 붙여 주었을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모겐? 이니고?

 

여덟 번째에서 멈춘 게 차라리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5년 6월 25일

 

백 명쯤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어머님께서 한사코 열겠다고 우겨대신 이번에 무도회가 가장 무도회라

 

기에 베네딕트도 착하게 반가면을 썼지만 모두들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 모두 '대강' 알아보았다고 하는 게 맞을까

 

 

"어머, 브리저튼 가 사람이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신나서 외쳤다

 

 

"브리저튼 씨 맞죠?" "브리저튼이네! 브리저튼 가 사람들은 어디서 봐도 알 수 있어요"

 

 

베네딕트는 브리저튼 가의 사람이다 어느 집에서 태어나고 싶은지 굳이 선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브리저튼 가를 택

 

하겠지만, 가끔은 자신이 브리저튼 가 사람이기보단 자기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로 그때 양

 

치기 아가씨 의상을 입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가 지나가며 한 마디 했다 "브리저튼 씨로군요!" 그녀가 아주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밤색 머리카락은 어디에서 봐도 알아볼 수 있답니다 어느 분이세요? 아니 말씀하지 마

 

세요 어디 보자 자작님은 방금 전에 뵈었으니, 자작님은 아니시고 넘버 투나 넘버 쓰리시군요" 베네딕트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봐 주었다 "어느 분이세요? 넘버 투세요 넘버 쓰리세요?" 넘버 투입니다만" 그가 물어뜯듯 말

 

했다 그녀는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아, 가서 포시아를 찾아야겠네 포시아에게 당신이 넘버 투라

 

고 했는데..........." 내 이름은 베네딕트야 그는 하마터면 소리내어 으르렁댈 뻔했다 "자꾸 아니라잖아요 자꾸 셋째 아드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전............."

베네딕트는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죽이거나 흥분해서 '바보야' 라고 소리를 지를

 

지도 모른다 보는 눈이 너무 많은지라 그렇게 하고 나면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매끄럽게 말했다 "꼭 찾아서 얘기를 나눠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그건 거짓말이었지만 상

 

관없었다 짤막하게 늙은 양치기 소녀에게 목례를 하고선 그는 지그재그로 걸어 무도회장의 옆문으로 다가갔다 사

 

람들에게서 벗어나 큰 형님의 서재로 숨어들어 평화와 조용함과 브랜디한 잔을 즐겨 볼 심산이었다 "베네딕트!" 제

 

기랄, 안 들키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 서둘러 다가오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엘리자베

 

스 여왕 시대 의상 같은 것을 입고 계셨다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여주인공 중 하나인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심지어 대답을 하지 못하면 목숨이 달아난다 해도 도저히 떠오르지를 않았다 "무엇을 도와드

 

릴까요, 어머님?" 그가 물었다 "설마 '허마이오니 스마이드-스미스와 춤을 추어라'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시

 

겠지요? 저번에 그 여자와 춤을 추었다가 한꺼번에 발가락 세 개를 잘릴 뻔했답니다" "그 애를 부탁할 생각은 아니

 

었다"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프루던스 페더링턴과 춤을 좀 춰달란 말을 하려고 했지" "어머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그가 신음했다 "그 여자는 더 심하다구요"

"그 애랑 결혼을 하란 것도 아니잖니"어머니가 말했다 "그냥 춤만 춰주면 된다니까" 베네딕트는 터져나오는 신음

 

 

을 참았다 프루던스 페더링턴도 따지고 보면 아주 좋은 사람이긴 할 테지만, 두뇌 크기는 콩알만한데다가 그 웃음소

 

리는 어찌나 귀에 거슬리는지, 다 자란 남자들이 손으로 귀를 막고 도망가는 광경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하

 

지요 어머니" 그가 슬쩍 제안을 했다 "프루던스 페더링턴을 막아 주시면 페넬로페와 춤을 추겠습니다" "그거면 됐

 

다" 어머니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베네딕트는 애시당초 어머님이 자신과 춤추게 만들고 싶으셨

 

던 상대가 아마 페넬로페가 아니었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페넬로페는 저기 레모네이드 테이블 옆에 있

 

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레프리콘(아일랜드 민담에 나오는 60센티미터쯤 되는 키의 작은 요정으로, 초록색 모자,

 

 

초록색 상의 ,초록색 바지를 입으며, 가죽으로 된 앞치마를 두르기도 한다 레프리콘은 금덩이가 묻힌 항아리를 숨겨

 

놓는다고 하며, 네잎 클로버처럼 행운을 상징하기도 한다)

의상을 입었더구나 불쌍한 것 색깔은 어울리더라만, 정말이지 다음 번에 그 집안 사람들이 드레스를 맞추러 갈 때는

 

누가 좀 그 애 어머니를 따라가 줬으면 좋겠어 저것보다 더 끔찍한 의상이 또 있을지"

 

 

"어머님이 아마 인어를 못 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나 보군요" 베네딕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의 팔을 가볍게 쳤

 

다 "손님들 의상을 가지고 놀리면 쓰나" "놀리지 않게 좀 입고 와야 말이지요" 어머니는 짐짓 경고의 시선을 보낸 뒤

 

말했다 "난 네 여동생이나 찾으러 가련다" "여동생 누구요?" "아직 결혼 안 한 애" 바이올렛이 쾌활하게 말했다 "겔

 

프 자작이 비록 스코틀랜드 아가씨에게 폭 빠져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니까" 베네딕트는 속으로 겔

 

프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 그 불쌍한 녀석이야말로 행운이 필요할 테니까

"아, 페넬로페와 춤 춰주어서 고맙다" 바이올렛이 노골적으로 말했다 베네딕트는 어색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다 그 말이 진짜 고맙다는 뜻이 아니라 춤추는 것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말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약간 방어적인 자세로 팔짱을 끼고서는 어머니가 다른 곳으로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레

 

모네이드 테이블로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레모네이드 테이블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정말이지 어머님을 숭배해 마지않기는 하지만, 자식들의 결혼에 지나치게 극성이다 싶을 만큼 참견이 심하신 건 사

 

실이다 베네딕트가 미혼이란 것보다 어머님의 마음을 더 불편하ㅔ 하는 것이 있다면, 아무에게도 댄스 신청을 받지

 

못해 시무룩해져 있는 젊은 여자의 얼굴이 아닐까 그 결과 베네딕트는 댄스 플로어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끔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여인네들과 춤을 추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 무도회

 

의 호박 꽃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두 부류의 여인네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그는 주저 없이 호박꽃을 택한다 인기가 좀 있는 여인들은 대부분 천박

 

하기가 그지없고, 솔직하게 밝히자면 조금 따분하기까지 하다

 

 

어머님은 언제나 페넬로페 페더링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신다 이번이 그녀의 몇 번째 시즌이던가.........베네딕트

 

는 얼굴을 찡그렸다 세 번째 시즌이던가? 세 번째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여태 결혼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아, 뭐 내

 

문제는 아니니까 가서 의무방어전이나 치르자 페넬로페는 착한데다가 꽤 재치도 있고 성격도 좋은 편이다 언젠가

 

는 그녀도 남편감을 찾을 수 있겠지 그 남편감이란 게 물론 베네딕트 자신은 아닐 테고 아마도 그가 아는 사람 중 하나일 수도 없겠지만, 언젠가 누군가를 찾기는 할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베네딕트는 레모네이드 테이블로 다가가려고 발을 뗐다 입안에서 향기롭게 착 감기는 브랜디 맛이

 

느껴지는 착각까지 들건만, 일단 몇 분간은 레모네이드로 참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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