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스무 번째 생일이 지난 것도 벌써 1년 전 얘기다 스무 살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펜우
드 하우스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아라민타를 모시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ㅡ아마 아라민타
는 새 하녀를 훈련시키기가 귀찮았나 보다(혹은 봉급을 주는 게 싫었을 수도 있다)ㅡ아리민타는 소
피가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소피는 이 집에 남았다 비록 아란타가 악마라곤 하지
만, 그래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피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악마들보다는 원래 익숙한 악마가 조
금이라도 낫지 않겠는가 그 때만 해도 아라민타의 괴롭힘이 점점 더 심해질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
했었다 "쟁반이 무겁지 않아?" 소피는 눈을 깜박이며 백일몽에서 깨어나 쟁반에 놓인 마지막 비스
킷에 손을 뻗는 포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네, 꽤 무겁네요 이만 부엌으로
가져가야겠어요" 포시는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잡지 않을게 어쨌건 그걸 가져다 놓고 나면 내 분
홍색 드레스 좀 다려 줄 테야? 오늘 밤 입으려고 그래 아, 잊지 말고 그 드레스에 어울리는 구두도 준
비해 줘 저번에 신고 나갔을 때 흙을 좀 묻혔어 우리 어머니가 신발에 대해 얼마나 깐깐하신지 소피
도 알지? 드레스 자락 아래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데도 왜 그러시나 몰라 계단을 올라가려고 드레스 자락을 딱 치켜들면 그 순간에 눈치채시잖아"
고피는 고개를 끄덕인 뒤, 오늘 해야 할 일의 목록에 포시의 주문을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봐!" 마지막 비스킷을 깨물며 포시는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피는 무거운 쟁반을 들고 힘겹게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뒤, 소피는 무릎을 꿇고 앉아 이빨 사이에 핀을 물고 시간에 쫒겨 아라민타의 무도회 의상을 손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드레스는 옷가게에서 아라민타의 몸에 딱 맞게 만들어져 배달되
어 왔지만, 아라민타는 허리 부분이 05센티미터 정도 늘어진다고 우겼다 "이제 어떠신가요?" 소피
는 핀이 떨어질세라 이를 꼭 악물고 말했다 "너무 꼭 껴" 소피는 판을 몇 개 뽑았다 "이젠 어떠세요?"
"너무 헐렁해" 소피는 핀을 뽑았다가 그 자리에 다시 꽂았다 "자, 이젠 어떠세요?" 아라민타는 이
리저리 몸을 돌려 보더니 만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럭 저럭 맞네" 소피는 남몰래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서 아라민타가 드레스를 벗는 것을 도왔다 "시간에 맞춰 무도회에 가야 하니까 한 시간 내에
손을 봐" 아라민타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소피가 웅얼거렸다 아라민타와 말을 할 때는 그냥 "물
론이지요" 란 말만 내뱉으면 인생이 훨씬 더 편해진다 "이번 무도회는 아주 중요해" 아라민타가 날
카롭게 말했다 "올해는 반드시 로자먼드가 훌륭한 배필과 식을 올려야 한다고 새 백작이란 자
는..........." 그녀는 혐오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 백작이 선대 백작의 생존해 있는 가장 가까운 남
자 친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까지도 새 백작에게 작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어쨌거나, 새 백작 말로는 우리가 런던의 펜우드 하우스를 쓰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하
더구나 뻔뻔스럽기도 하지 나는 백작 미망인이란 말이다 게다가 로자먼드와 포시는 백작님의 딸들이 아니더냐"
의붓딸이겠지 소피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우리에겐 사교계 시즌 때 펜우드 하우스를 이용할 자격
이 있단 말이다 도대체 이집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아마 새 백작님도 시즌 때 이
리로 오셔서 아내 감을 물색하시려나 보지요" 소피가 말했다 "어쨌거나 그분도 후계자를 원하실 테
니까요" 아라민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로자먼드가 돈 있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
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쓸만한 집을 찾기가 워낙 힘들어 놔서 집세도 만만치 않은건 물론이고" 적어
도 시녀에게 돈 줄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시겠구랴란 말을 해주려다가 꾹 참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
지, 소피가 스무살이 되기까지는 시녀를 부리는 것만으로 1년에 4천 파운드씩을 받지 않았느냔 말
이다 아라민타가 손가락을 딱 퉁겼다 "로자먼드는 머리카락에 파우더 칠해주는거 잊지 말아라" 로
자먼드는 마리 앙투아네트 차림으로 무도회에 참석한다 소피가 농담 삼아 목 둘레에 가짜 피를 칠
할거냐고 물었지만, 로자먼드는 웃기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아라민타는 화장용 가운을 입으
며 빨고 딱딱한 손놀림으로 허리끈을 죄었다 "그리고 포시는.........." 그녀는 코를 찡그렸다 "뭐, 포
시도 어쨌거나 네 도움이 필요할거야" "포시 아가씨를 돕는 거야 항상 즐겁지요" 소피가 대답했다
아라민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피가 빈정대는 것인지 가늠해 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 어쨌거나
돕기나 해"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음절씩 끊어서 딱딱하게 말한 뒤 화장실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소피는 아라민타가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거기에 대고 경례를 해보였다 "아, 여기 있었구나 소피"
로자먼드가 방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지금 당장 좀 도와 줘야겠어" "미안하지만 좀 기다려
야........." "지금 당장이랬잖아!" 로자먼드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소피는 어깨를 곧추세운 뒤 로자먼드에게 완고한 시선을 보냈다 "마님께서 드레스를 고치라고 하
셨단 말이에요" "그냥 핀 뽑고 다 고쳤다고 하면 되잖아 어머님은 어차피 눈치 못 채신다고" 안 그
래도 소피 역시 그렇게 할까 생각하고 있었던 차라 신음을 내뱉었다 만일 로자먼드가 하라는 대로
했다간 그 다음날 아침 어머니에게 나불나불 고해바칠 테고, 그러면 아라민타의 분노는 거의 한 주
동안 하늘을 찌를 게 뻔하다 이젠 정말 드레스를 고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가 필요하신데요?"
"내 의상에 좀 찢어진 곳이 있어 도대체 어쩌다가 찢어졌는지 알 수가 없어" "아마 입어보시다
가........." "말도 안되는 소리!" 소피는 입을 딱 다물었다 똑같이 지시를 받아도 아라민타에게 받는
것보다 로자먼드에게 받는게 더 어렵다 아마도 로자먼드와는 한때 같은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
던 위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고쳐 줘야겠어" 로자먼드가 말했다 소피는 한숨을 내
쉬었다 "가져다 줘요 마님 옷이 끝나는 대로 할게요 시간 내로 맞쳐 드리겠다고 약속드리지요 " 이
무도회는 늦으면 안 된다고" 로자먼드가 경고조로 말했다 "너 때문에 늦게 되면 네 목을 잘라서 머리를 접시에 올려놓을 거야"
"걱정마세요" 소피가 약속했다 로자먼드는 꽤나 거만한 흠 소리를 낸 뒤 의상을 가지러 서둘러 방
에서 나섰다 "아야!" 고개를 들어 보니 로자몬드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오는 포시와 부딪힌 참이었
다 "눈 좀 제대로 뜨고 다녀, 포시!" 로자몬드가 빽 소리를 질렀다 "언니도 좀 보고 다녀" 포시도 지
지 않고 말했다 "난 보고 있었어 네가 하도 뚱뚱하니까 피할 수가 없잖아 몸집만 커다란 머저리" 포
시는 뺨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옆으로 물러섰다 "뭐 필요한거 있어요 포시?" 로자먼드가 사라지자
마자 소피가 물었다 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따가 짬을내서 머리를 만져 주지 않겠어? 꼭
미역처럼 보이는 초록색 리본을 찾았지 뭐야" 소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녹색 리본이라면
포시의 짙은 머리카락에 묶어도 별 표도 나지 않을 테지만, 포시가 딱해서 그런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낼 수 있게 노력해 볼게요 포시 하지만 먼저 로자먼드 아가씨와 마님의 드레스를 고쳐야 해
요" "오" 포시는 아주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포시가 너무 딱해 보였다 아라민타의 집에서 하인
들을 빼면 소피에게 그래도 친절하다 싶은 사람은 포시가 전부였다 "걱정 말아요" 그녀가 포시를
달랬다 "시간이 아무리 쫒겨도 포시 머리 만큼은 예쁘게 단장해 줄 테니까"
"어머 고마워 소피! 난............" "아직도 드레스 고치는거 시작 안 했니?" 아라민타가 화장실에서 돌
아오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로자먼드 아가씨와 포시 아가씨와 얘기를
했어요 로자먼드 아가씨 드레스가 찢어졌다기에............"
"일이나 해!" "네 네 당장 시작해야죠" 소피는 등받이가 있는 긴 의자 위에 얼른 주저앉아 드레스
안팎을 뒤집은 뒤 허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하기도 전에 끝냅죠" 그녀가 중얼거렸다 "벌새의 날갯짓보다 빠르게, 숨 한번 들이쉬었다
내쉬는 것보다 빠르게.........."
"도대체 뭐라고 주절되고 있는 거야?" 아라민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쓸데없이
종알거리는 건 당장 그만둬 네 목소리만 들으면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선다" 소피는 이를 꼭 깨물었
다 "엄마" 포시가 말했다 "소피가 오늘밤 내 머리를 어떻게 해줄 거냐 하면요......" "당연히 머리를
해주겠지 너도 이제 꾸물거리는 건 그만두고 가서 눈에 습포나 얹어라 눈이 팅팅 부었다"
50원만~~
내일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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