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당신을 만나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그의 눈에 희미한 경탄의 빛이 서렸다
"당신 이름을 가르쳐 줘 내일 어디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지도 알려줘"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
그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애원하는 순간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이국적이고도 길게 꼬리를 끄는 소리
"자정이 된 모양이오, 가면을 벗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지"
"자정이라고요?"
그녀가 경악하며 물었다
"이제 가면을 벗을 때요"
소피는 황급히 한 손을 들어 관자놀이로 가져가 가면을 꼭눌렀다
"가야해요"
스포일러!
프롤로그
모두들 소피 베켓이 사생아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모두 란 것에는 하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세살이 된 꼬마 소피가 커다란 외투를 입고 어느 비 오는 7월밤 펜 우드 파크 현
관 앞에 혼자 서 있던 그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했다 모두들 사랑했기에 6대 펜우드 백작이 말
한 것을 믿는척 했다 소피는 백작의 오랜 친구의 딸로 최근에
고아가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소피는 짙푸른 녹색 눈과 짙은 금발머리가 백작의 것과 똑같다
는 것도 모르는 척했다
아이 얼굴의 윤곽이 얼마 전 돌아가신 백작의 모친과 똑같이 닮았다는 것도, 그녀의 미소가 백작 여동생의 미소와
판박이라는 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 누구도 그런점을 지적해 소피의 감정을 상하게 ㅡ혹은 자신들의 생업을 위협받
는 짓을ㅡ 하고싶지 않았으니까 리처드 거닝워드 백작은 비록 단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지만, 아마도 소피가
자신의 사생아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피가 발견된 비 오는 날 자정, 하녀장이 소피의 주머니에서 꺼
낸 편지에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백작이 그 편지를 읽은 즉시 불에 태워 버렸으니까 백작은 편
지지가 불 속에서 쪼그라들며 말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뒤, 육아실 근처에 소피의 방을 만들어 주라고 지시했다
그 후 그곳이 그녀의 방이 되었다 백작은 그녀를 소피아라고 불렀으며,소피는 그를 나리라고 불렀다 두 사람이 얼굴
을 마주치는 것은 1년에 몇 번, 백작이 런던에서 집으로 돌아올때 뿐이었고 그나마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소피가 자신의 사생아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지만, 어쨌
거나 알고있었다 거의 평생 알고 있었다고 할까 펜우드 파크로 오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기억은 거의 없지
만, 마차를 타고 영국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침을 하며 쌕쌕거리던, 수수깡처럼 비쩍 마
른 할머니 역시 할머니는 이제 아버지와 살게 되는거라고 하셨다 또한 할머니는 비 오는 밤 소피를 현관 문 앞에 세
워두고 군처 덤불에 몸을 숨긴 뒤 백작이 그녀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백작은 어린 소녀의 턱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얼굴을 들어 불빛 아래 비쳐 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소피가 사생아란 건 알지만 그 누구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모두들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었다
백작이 결혼하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그 소식을 들었을때 소피는 상당히 기뻤다 하녀장 말이 집사가 백작의 비서에게 들었는데 백작께서 이제 가족이 생
겼으니 펜우드 파크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백작이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ㅡ
어차피 집에 오더라도 그녀에게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데 보고 싶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까ㅡ 백작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 그분을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시 백작과 소피가 서로에 대해 좀더 많이 알
게 되면 그렇게 자주 펜우드 파크를 비우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위층 하녀 말로는 하녀장이 옆집 집사에게서 들었는데 백작이 결혼하려는 레이디에겐 이미 소피 또래의 딸이 둘 있다고 했다
육아실에서 홀로 7년을 보냈던 소피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근처에 사는 다른 어린이들과는 달리 소피는 마을에서 열
리는 파티나 행사 등에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 누구도 소피 앞에서 대놓고 사생아라 부르진 않았다ㅡ 그것은 결국 소피가 자신의 피후견인이라 선언한 뒤 단 한 번도 그 말을 번복하지 않은 백작이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그러는 백작 역시 소피가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게끔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열살이 된 소피의 가장 친한 친구는 하녀에 하인이었고, 집사와 하녀장이 부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젠 진짜 자매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언니나 동생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자신이 백작의 피후견인인 소피아 마리아 베켓이라 소개 되리란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은 자매처럼 느껴질 것이다 중요한건 그것 아닌가
어느 2월의 오후, 소피는 현관 앞 넓은 홀에서 하인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며 새 백작부인과 그녀의 두 딸, 그리고 물론 백작이 탄 마차가 이제나저제나 도착할까 고대하며,
"그분이 날 좋아하실까?"
소피가 하녀장인 기븐스 부인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백작님의 부인되시는 분 말야"
"물론 그분은 아가씰 좋아하실 거예요"
기븐스 부인이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목소리만큼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
새 백작 부인은 남편의 사생아인 소피의 존재를 곱게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분 딸들과 함께 수업을 받게 되는 거야?"
"아가씨 혼자 따로 수업을 받으실 까닭이 없잖아요"
소피는 짐짓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가 현관앞에 멈춰 서는것을 보고
몸을 옴죽거리기 시작했다
"도착하셨어!"
그녀가 속삭였다
기븐스 부인은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했지만, 소피는 벌써 창가로 달려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먼저 백작이 내리더니 손을 내밀어 두 소녀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소녀들은 똑같은 검정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한 명은 머리에 분홍색 리본을, 다른 쪽은 노란색 리본을 묶고 있었다
두 소녀가 옆으로 비켜서자, 백작은 손을 내밀어 마차에 타고있던 여인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새 백작 부인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기다리며 소피는 숨까지 멈췄다 그녀는 손가락을 십자가 모양으로 겹치고
제발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되풀이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발 그 분이 절 사랑하게 해주세요
만일 백작부인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백작님 역시 날 사랑해 주실지도 몰라 딸 대접을 해주실지도 모른다고
모두 진정한 한 가족이 될 수 있을 지도 몰라
소피가 창을 통해 내다보고 있는데 마침내 새 백작 부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어찌나 우아
하고 고상했던지, 소피는 정원에 있는 수반에 미역을 감으러 종종 나타나는 섬세한 종달새를 떠 올렸다 백작부인의 모자에는 길다란 깃털이 꽂혀 있었다 청록색 깃털이 겨울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아름다우신 분이다"
소피가 속삭였다 그녀는 얼른 기븐스 부인을 돌아보고 그녀의 반응을 가늠해 보려 했다 하지만 하녀장은 똑바로 앞
을 향한 채 백작이 새 가족들을 집안으로 모셔와 소개시켜 주기를 기다리며 뻣뻣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소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난 어디에 서야 하는 것일까 모두에게 정해진 위치가 있는것 같았다 하인들도 잡사부터 가
장 하급인 설거지 하녀까지 계급별로 늘어서 있었다 심지어 개들조차 사냥개 사육사의 손에 들린 목줄에 묶여 모퉁
이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소피는 설자리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이 집안의 친딸 이었다면, 가정교사와 함께
서서 새 백작부인을 가다렸을 것이다 그녀가 만일 백작의 진정한 피후견인이었다 해도 같은 위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티몬스 양은 열이 난다며 육아실에 틀어박혀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인들 중 그 누구도 가정교사가 진정으로 아플 거란 생각은 하지않았다.
어젯밤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가 꾀병을 부린다고 탓할 수 없었다 소피는 결국 백작의 사생아였으니까 새 백작 부인에게 남편의 사생아를 소개하는 무례하고 대담한 짓을 감히 저지를 사람은 없었으니까
장님이나 바보, 혹은 눈먼 얼간이라면 모를까, 소피가 단순한 피후견인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커다란 수줍음을 느끼고 소피는 두 명의 하인들이 거창한 몸짓으로 현관문을 열어젖힐때 얼른 구석으로 들어가 처박혔다 두 여자 아이들이 먼저 옆으로 물러서자 백작이 백작부인을 대동하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백작이 백작부린과 딸들을 집사에게 소개하자, 집사가 그들을 하인에게 소개했다 소피는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집사가 하인과 요리장 하녀들과 마부들을 소개했다
소피는 기다렸다
그는 부엌 하녀들과 위층 하녀와 설거지 하녀를 소개했다
소피는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집사가ㅡ그의 이름은 럼지였다ㅡ 고작 일주일 전에 고용된 하급 중에서도 제일 지위가 낮은
부엌 심부름꾼 덜시를 소개하자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소피는 도대체 뭘 하면 좋을 지 몰라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헛기침을 하며 얼굴에 불안한 미소를 띠고 한발 앞으로 나섰다 소피는 백작과 별로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았지만, 백작이 펜우드 파크에 들를 때면 언제나 그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었다 백작은 잠시 수업에 대해 묻고는 다시 욱아실로 돌려보내곤 했었다
설마 결혼을 하셨어도 내가 수업을 잘 받고 있는지쯤은 궁금해하실 테지 복잡하기 짝이없는 분수 곱셈을 잘배웠는지 알고 싶으실 거야 게다가 티몬스양은 항상 소피의 프랑스어 발음이 완벽 하다고 칭찬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백작은 백작부인의 딸들에게 무슨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소피가 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피는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나리?"
생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훨씬 더 꺽꺽 거리며 나왔다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아,소피아"
그가 중얼거렸다
"네가 홀에 나와 있는지 몰랐구나"
소피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날 무시하신게 아니라 못 보신 거였어
"이 아이는 누구지요?"
백작부인이 소피를 좀더 잘 보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내 피후견인이오"
백작이 대답했다
"소피아 베켓 양이라오"
백작부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피를 평가한뒤 실눈을 떴다
그 눈이 더 가늘어졌다
그리고 좀더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순간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백작부인이 정말로 알아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자먼드"
백작이 두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
"포시, 날 따라오너라"
소녀들은 얼른 어머니 곁으로 가 섰다 소피는 그들쪽을 바라보며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더 어린 소녀가 소피를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황금색 머리카락을 한 나이든 소녀는 어머니의 신호를 즉각
알아차리고 코를 치켜든채 단호히 고개를 돌렸다
소피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친절한 쪽 소녀에게 다시 미소를 지었지만 소녀도 이번에는 망설이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바닥을 바라볼 뿐이었다 백작부인은 소피에게서 등을 돌이고 백작에게 말했다 "로자먼드와 포시를 위해 방을 마련해 주셨겠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아실 옆에, 소피 옆방으로 준비해 두었소"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하인들 앞에서 첫날부터 전쟁을 치러선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백작부인이 말했다
"이제 그만 위층으로 올라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백작과 딸들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소피는 새 식구들이 계단을 올라가 위층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기븐스 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올라가서 도와드려야 할까? 로자먼드와 포시에게 육아실을 보여줄 수도 있는데"
기븐스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들이 다들 피곤해 보이시더군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
"아마 낮잠을 주무실 모양이에요"
소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로자먼드는 열한살이고 포시는 열살이라고 들었다
낮잠을 자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byebye
50원 기부 아시죠? 아님 폭망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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