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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

신사와 유리구두 (3회)

 

(1)

 

올해 모두가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초대장은 아마도 다음 주 월요일에 열리는 브라저튼 가의 가장

 

무도회 초대장일 것이다 어디를가나 누가 참석하는지 그보다 더 중요한 얘기인 누가 무엇을 입을

것인지 추측하는 사교계의 어머니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을 수 없다

 

허나 조금전에 언급한 두 가지 주제라도 브리저튼 가의 두 독신 형제 베네딕트와 콜린에 관한 이야

 

기보다 더 흥미로울 수는 없다(누군가가 브리저튼가에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가 하나 더 있다는 말

 

을 하기 전에 미리 지적하는 바 본 필자 역시 그레고리 브리저튼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열네살 밖에 되지 않았고 본 필자의 칼럼이 주로 다루는 주제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스포츠

 

즉 남편 사냥 인지라 본 칼럼에 오르내리기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다)

 

비록 브리저튼 씨들은 말 그대로 작위가 없는 '씨'에 불과하나, 두 사람은 이번 시즌 최고의 대어로

 

지목받고 있다 두 사람이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게다가 두 사람이

 

다른 브리저튼 가 자제들이 모두 소유한 특유의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눈이 특출하게 좋지 않아도 알수 있다

어떤 운 좋은 젊은 레이디가 가장 무도회의 신비스런 분위기를 이용해 이 중 한 남자를 낚아 올릴 것인지?

본 필자 감히 상상도 할수없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5년 5월 31일

 

"소 피! 소피이이이이이이이!"

 

유리에 금이라도 갈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다 적어도 고막을 터뜨리기엔 충분하다 "가요, 로자먼

 

드! 간다구요!"소피는 투박한 모직 스커트자락을 움켜쥐고 얼른 계단을 올라갔다 네 번째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재빨리 난간을 움켜쥐지 않았으면 엉덩방아를 찧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계단이 특별히

 

미끄럽다는 것을 기억했어야 했는데 오늘 아침 아래층 하녀를 도와 계단에 왁스를 칠하지 않았던가

 

로자먼드의 침실 앞에서 끽 멈춰 서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네?" "차가 식었어" 소피가 하고 싶었

 

던 말은 "내가 한 시간전에 가져다 줬을때는 따뜻했다고, 이 게을러터진 마녀야" 하지만 소피가 한

 

말은 "다시 끓어다 드리지요" 로자먼드가 코를 훌쩍였다 "그래 얼른 가져와" 소피는 장님이나 미소

 

라고 부를 만한 표정을 지어 주곤 차 쟁반을 들었다  "비스켓은 남겨둘까요?"  그녀가 물었다 로자먼

 

드는 예쁜 머리를 흔들었다 "갓 구운 걸로 가져와" 묵직한 쟁반의 무게에 어깨가 약간 처진 소피는

 

방을 나서며, 방에서 멀리 떨어진 복도 저편에 닿을 때까지 투덜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로자먼드

 

는 항상 차를 주문한 뒤 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건드리지도 않는다 물론 그러고 나면 차는 식어 버리

 

니까 또다시 새로 한 주전자 끓여오라고 주문한다 그 말인 뜻은 소피는 항상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아래에서 위로,위에서 아래로 계단을 뛰어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어떨 때는 자신이 매일 하는 일은

 

그게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물론 드레스 수선, 다림

 

질, 머리 손질, 구두 닦기, 짜깁기, 침대 정리하기 등등등도 빼놓을 수 없다 "소피!"  소피가 고개를 돌

 

려 보니 포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피, 아까부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 색깔 내게 어울리는 곳 같

 

아?"  소피는 포시의 인어 의상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디자인 자체가 젖살이 여태 안 빠진 포시에겐

 

그리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색깔 만큼은 포시의 피부에 놀랍도록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녹색

 

이 아주 사랑스러워요" 소피가 진심으로 말했다 "뺨이 화사한 장밋빛으로 보이네요"  "아, 다행이다

 

 소피가 마음에 들어해서 다행이야 소피는 항상 내 드레스를 골라주는 데 재주가 있잖아" 포시는 손

 

을 뻗어 쟁반에 놓인 달짝지근한 비스킷을 하나 집어들었다 "어머니께서 가장 무도회 때문인지 이

 

번 주 내내 아주 기분이 안 좋으시더라고, 최고로 근사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정말 끝도 없이 잔소

 

리를 들을 거야 뭐............" 

 

 

포시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차피 최고로 근사한 모습이란 건 어머니 기준이니까 이번만큼은우리

 

두 사람 중 한 명이 브리저튼 형제들 중 하나를 낚아채야 한다고 단단히 벼르고 계셔  소피도 알지?"

 

 

"알아요"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휘슬다운이란 여자가 오늘 또 그 형제들에 대해 글을 썼지 뭐

 

야 그래 봐야" 포시는 비스킷을 다 씹고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어머니 욕심만 부추길 뿐이지만"   

 

"오늘 아침 칼럼은 어땠어요?"  소피가 엉덩이에 쟁반을 걸치며 말했다  "아직 읽을 시간이 없었는

 

데"  "아 뭐 흔한 얘기야" 포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루하기만 한 얘기들, 소피도 알지?" 소피

 

 

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써 보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포시의 지루하가만 한 삶을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볼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아라민타가 자신의 어머니였으면 좋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파티다 사교 모임이다 음악회다 하는 삶은 정말 꿈속에서나 그려 볼 수 있을 뿐이었

 

다 "어디보자"  포시가 생각에 잠긴 투로 말했다 "레이디 워드의 최근 무도회에 대한 평이 있었고,

 

스코틀랜드에서 온 아가씨에게 푹 빠져버린 겔프 자작 얘기가 있었지 그리고 곧 다가올 브리저튼

 

무도회에 대해 좀 길다 싶은 기사가 있었어" 소피는 한숨을 쉬었다  다가올  가장 무도회에 대한 글

 

을 벌써 몇 주전 부터 읽고 있었다 그래봐야 자신은 시녀에 불과하지만(종종 아라민타가 더 부려먹

 

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날엔 가정부가 되기도 하지만),무도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소망만은 버릴 수가

 

없없다 "그래도 겔프 자작이 약혼을 하게 되면 난 정말 기쁠 거야" 포시가 또다시 비스킷에 손을 뻗

으며 말했다.

 

"그러면 세상에 독신남이하나 더 줄어드는 거잖아 어머니가 끊임없이 불러주시는 남편감 목록에서

 

한 명이 주는 거고  어차피 내가 그분 관심을 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녀는

 

비스킷을 깨물었다  입안에서 비스킷이 와사삭 소리를 냈다  "그분이 약혼하시면 레이디 휘슬다운

 

이 그 얘기를 꼭 써줬으면 좋겠어" "아마 쓸 테지요"  소피가 대답했다 그녀는 1813년 레이디 휘슬

 

다운의 사교계 소식이 맨 처음 발행되었을때부터 여태까지 쭉 칼럼을 읽어왔다  이 가십 칼럼니스

 

 

트는 결혼 식장 소식에 관한 한 언제나 그 정확성을 자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소피가 자기 눈으로 결혼식장을 직접 구경해 본 적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휘슬다

 

운만 꾸준하 읽으면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고서도 런던 사교계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

 

었다   사실, 휘슬다운을 읽는 것이야말로 소피의 유일한 심심풀이였다  서재에 있는 책은 이미 다 읽

 

었는데, 아라민타나 로자먼드, 포시는 원래 독서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이 집안에 새 책이

 

들어오기를 바랄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휘슬다운은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그 누구도 칼럼니스트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2년 전 한 장짜리 신문아 배달되었을 때부터 모두의 의혹은 마른 나무에 불

 

번지듯 거세게 일었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레이디 휘슬다운이 흥미로운 가십 거리를 실으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녀의 정체에 대해 얘기를 하고 그게 누구일지 추측해 보곤한다 도대체 세상

 

의 그 누가 이토록 신속 정확한 보도를 할 수 있을까

 

소피에게 있어서 휘슬다운은 부모님이 법적으로 정당한 결혼을 하셨더라면 자신의 것이 되었을지

 

도 모를 세계를 감질나게 살짝 살짝 보여주는 창구였다 그녀가 백작의 사생아가 아니라 딸이었더라

 

면, 그녀의 성도 베켓이 아니라 거닝워드가 되었을것이다

 

단 한번만이라도 마차에 올라 무도회에 참석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파티에 참석하는 포시의

 

코로셋을 조여 주거나 로자먼드의 머리를 꾸며주거나 아라민타의 구두를 윤나게 닦는것이 그녀의

 

역할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불평을 할 수는 없다ㅡ 아니, 해서도 안 된다 비록 아라민타와 그 딸들의

 

시녀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집이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다

 

른 소녀들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며 아무것도 남겨주시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비를피할 지붕은 주셨지 아버지의

 

유언장에 그녀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쫒아내선 안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아라민타가 소피

 

를 쫒아내어 일년에 4천 파운드나 되는 돈을 날려 버릴 턱이 없다

 

하지만 그 4천 파운드는 아라민타의 돈이지 소피의 것이 아니었다 그 4천 파운드는 동전 한닢 구경

 

해 보지 못했다 그녀가 입던 고운 옷들은 어느새 하인들이 입는 거친 모직 옷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녀는 다른 하녀들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ㅡ다시말해, 아라민타나 로자먼드나 포시가 먹고 남긴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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